2022년 1~6월

한선주 : 불멸낭만-먼지로 쓴 시

2022. 1. 04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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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이래로 급변한 사회문화현상은 여전히 우리의 일상에 침잠해 있지만 그 압력의 틈새에서 ‘인간이라는 낭만’은 존재하고 있다. 이 시대의 정서적, 심리적으로 소멸해가는 낭만의 종말을 유보시키며 덧없는 존재가 한 편의 시로 남을 수 있는 낭만성에 관하여 조명한다. 
그동안 한선주의 작업이 짓누르는 듯한 무게의 슬픔과 그 해소의 과정을 서사적으로 표현하였다면, 이번 전시는 다소 명랑한 밝기의 슬픔을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작가가 본 전시에서 표현한 슬픔은 자신을 둘러싸고 억압했던 외력에서 벗어난 후 바라본 자신의 세계관과 존재감, 인생감에 관한 것이다. 지금까지 작가가 상실과 허무감를 애써 제거해 나가며 무가치한 시간을 밀어내는 방식으로 슬픔에 대해 접근했다면, 이번 전시는 오히려 그 덧없음과 화해한 듯 흘러가며 어떤 가치에도 거주하지 않는 입장을 보여준다. 끊임없이 도달하려고 분투했던 작가의 강렬한 열망이 놀랄만치 허무하게 증발해버린 듯해 당혹스러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는 타자를 향한 그리움과 끝내 버리지 못하는 소원들을 담채보다 옅게 하여 감추려 들지 않았다. 때문에 이번 전시에서 보이는 작품들은 한선주가 끌고 나가는 주요서사의 일부로써, 단편적으로 개입되는 낭만적 사색의 순간들을 묘사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작가의 사색이 어느 철학적 지점에 안착했다기 보다 그에게 새로운 차원을 맛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고 또 그 속에서 자신의 것을 소화시키고 이해하려는 시도가 시각화 된 것으로 말이다. 
심심한 듯한 작가의 그림에서 예상 밖으로 발견하는 낭만과 내면 깊숙이 가라앉은 천진함을 마주하고, 먼지로 쓴 시 같은 그녀의 낭만이 어떻게 불멸이란 단어로 해석되고 있는지 살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작가노트

내가 그리고자 했던 낭만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담백한 맛이 난다. 과거의 작업들에서 느낄 수 있었던 무게나 열기가 증발해버린 듯한 느낌이다. 물 위로 부는 바람에서, 살며시 흔들리는 버드나무 잎에서, 별빛이 스러지며 내는 청각적 심상에서 내가 정의한 낭만이 새롭게 설명되고 있다. 그러나 이 낭만은 결코 감상적이지는 않다. 나는 우주적 관점과 영원의 시선에서 찰나에 스친 인생의 유한성을 낭만과 먼지로 해석하였다. 
먼지로 쓴 ‘불멸낭만’이란 시는 먼지와 불멸이란 단어가 충돌하면서 기묘한 기분을 자아낸다. 불멸과 영원의 무게를 먼지처럼 느끼는 것은 유한한 인간이 자신의 전부로 겪는 시간의 총체가 결국 덧없는 찰나에 지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낭만적이고자 하는 이유는 영원을 꿈꾸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원과 불멸, 완전이라는 단어는 유한한 존재가 가늠할 수 없는 미지의 개념이다. 나는 네 글자의 조합이 창출하는 뜨거운 열망과 완벽한 실패의 직조가 인간의 삶을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삶에 이따금씩 찾아오는 낭만적인 순간들이 한 숨에 실려 사라지듯, 우리의 존재 또한 “광막한 우주 변두리 창백한 푸른별”에 잠시 있다 사라지는 먼지 한 올에 불과하듯, 우주와 영원의 시선이 바라본 각자의 인생은 불멸이 경험한 낭만의 순간으로 남는다.
나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 그려진 빈 집을 차용하여 종이집으로 각색했다. 아무것도 칠하지 않은 빈 종이집으로 한지의 피부를 고스란히 드러내며 인간존재의 덧없음과 가벼움, 고독함과 쓸쓸함을 말하려 했다. 끊임없이 변하는 물의 움직임은 계속해서 변화하는 세계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비유한다. 물 위를 떠다니는 종이집의 가벼움과 종이집이 젖기까지의 짧고 위태로운 시간을 통해 인생의 유한성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종이집과 일맥하는 방식으로 표현한 빈 땅은 내 자신이 처한 모호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태도로 읽힌다. 그러나 그 모호함 속에 서있는 화자는 체념과 방랑 없이 매일매일 비질을 하고 석등에 불을 키며 자신의 근원을 기억하려 한다. 

작가소개

삶과 죽음, 불멸과 필멸에 대한 사색을 서사의 내러티브 형식으로 보여주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그 작업의 발단은 관계의 상실과 스스로의 고립에서 비롯된 고독과 소외라고 할 수 있다. 한선주는 고독과 소외로부터 벗어나게 할 외부적 공간과 절대적 타자를 추구하는 듯 보이지만, 오히려 깊은 절망과 소외의 질곡 속에 자리한 불행과 대면하면서 그곳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구원과 아름다움의 의미를 조명한다. 작가는 작업을 통해 자신의 끊임없는 자아의 재창조과정을 보여주면서, 우리에게 ‘어떤’ 천국이 아니라 ‘어디에’ 천국이 있는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최근 개인전으로는 갤러리 도스_Gallery DOS <고도를 기다리며>, 2019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주관한 도시개발뉴딜프로젝트 <약ㅅㅏㅓ산책>파트의 <미슈테카의 노래>로 춘천에서 개인전을 연 바 있다. 홍익대학교 프로덕트 디자인을 전공하였고 동대학원 동양화과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같은 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한 상태다. 

room : 은둔과 안온

2022. 2. 16 - 3. 06
김수영 김효주 송신규 최덕화 한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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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에게는 누구나, 숨어 있기 좋은 방(room)이 있다. 
그곳은 창작의 장소이자 피안의 은둔처이다. 작가는 아낌없이 고독 속으로 들어가 상처와 아픔을 응시하고 좌절하며 치유한다. 그 지점에서 비로소 작가의 상상은 시작되며 스스로에게 오롯이 집중하는 시간을 통하여 구원의 빛을 발견하고 영혼의 거처를 짓는다. 
개나리미술관에서 2월 16일부터 3월 6일까지 진행되는 <room-은둔과 안온>展에는 회화, 사진, 설치 등 매체의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탐구하는 다섯 명의 작가(김수영, 김효주, 송신규, 최덕화, 한선주)의 room(방)이 전시된다. 다섯 명의 작가들은 ‘혼자만의 방’이라는 키워드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내밀한 상처를 끄집어내거나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단절된 현실을 가로지르며, 그리움의 단상들을 집적해 나간다. 코로나19라는 팬데믹과 공존해야하는 혼돈과 불확정의 시대에 작가의 방을 소환하는 것은 확장과 상승으로 치닫던 시간을 잠시나마 정지시키고. 각자의 내면을 들여다보기 위함에 있다. 
이는 현실을 외면하고 외부와 단절된 삶을 선택하는 차원이 아닌, 온전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또 다른 상상의 영역을 열어가려는 시도이다. 작가의 방(room)에서의 사색과 탐험의 시간이, 누구나 꿈꾸었던 ‘은둔과 안온’의 안식처를 찾아 떠나는 여정이 되길 바란다.

개나리아트페어2022
Home Sweet Home

2022. 4. 05 - 4. 17
강연이 권용식 김경원 김민영(Lucy) 김수영 김환 김효주 류재림 서숙희 서슬기 송신규 우희경 유은혜 이상길 이수현 이완숙 최덕화 최인엽 한선주 홍현지 황효창 8월의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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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상징하는 개나리는 춘천의 시화이기도 하다. 긴 겨울을 기다린 후에 개화하는 ‘봄꽃’과 같은 아트페어를 올해부터 매년 꽃이 피는 4월마다 개최할 계획이다. 
총 22인(팀)의 작가들이 함께하는 이번 아트페어는 지역 미술시장 활성화를 위한 움직임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한 달 전부터 전시운영위원회를 조직하고, 엄선된 작가군을 모집하여 전시의 수준을 높일 수 있도록 하였다. 

전시의 주제는 <Home Sweet Home>으로, 코로나19로 지친 시민들의 일상 속에 미술작품이 함께하도록 하여 삶의 환기와 치유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이에 특별히 윈도우 갤러리 공간을 집의 한 공간으로 가정한 쇼룸을 조성하였다.
청년작가에서부터, 완숙된 작품세계를 펼쳐나가는 중견 작가, 지역을 대표하는 원로작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세대의 작가들의 작품 150여점이 출품되었다. 또한 출품 장르에 있어서도, 회화, 조각, 도자, 일러스트, 사진 등 다양한 영역의 작업들이 함께하였다.

다양한 계층의 콜렉터가 부상하는 전국적인 흐름 속에서 춘천지역 미술계에 있어서 새로운 콜렉터층을 발굴하고, 시각예술 전업작가들의 미술시장에 활로를 개척할 수 있는 물꼬가 트일 수 있기를 바란다.

최인엽 : 거울 속 원더랜드  Wunderland im Spiegel

2022. 04. 22 -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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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뭉글뭉글한 헤테로토피아

글: 김태훈

1. 
거울은 예술에 대한 오래된 비유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가가 현실을 자기 나름대로 재구성한 모방, 즉 미메시스(mimesis)가 예술의 본질이라고 보았다. 이때 텍스트의 의미를 감각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필요한 수단이 그림에서는 색과 형태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peri poietikes)>에서 말했다. 이처럼 기원전 335년쯤이나 지금이나 예술로서의 그림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그 거울이 무엇을 비추고 있고, 보는 사람은 어떤 의미를 발견하는 것인지에서 나아가 테크놀로지가 거울의 기능을 다채롭게 변주하고 실천하는 것이 예술의 현재이다. 이러한 현대 예술의 지평에서 최인엽은 다시 회화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을 본분으로 삼는다. 흥미롭게도 거울을 가리키는 독일어 'Spiegel'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투명하게 비추겠다는 언론의 소명을 피력한 전후 독일의 최고 권위 시사주간지 'Der Spiegel'의 이름이기도 하다. 슈피겔지가 대변하는 현실과 그에 대한 목소리는 작가가 보는 거울 속 원더랜드 안에서는 비치지 않는데,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이번 전시의 타이틀을 직역한 한자어인 요지경(瑤池鏡)의 역설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의 원더랜드는 어떤 방식으로 구현되었을까? 

2.
최인엽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지배적 테마는 단연코 '움직임(die Bewegung)'이다. 여기서 움직임은 드로잉의 대상에서 현재 작가가 관찰하고 포착하는 대상으로 확장된다. 전자가 신체의 동적 움직임이라면, 후자는 영어 'movement'가 그러하듯 심리적이거나 기질적인 변화나 감동, 조직적인 운동이나 특정 인물의 행동 변화, 사회 정세 등의 동향이나 진전을 아우른다. 가시적인 형태만으로 나타나는 물리적 움직임에 비해 컨텍스트를 필요로 하는 상징이나 암시적 이미지는 최인엽의 작품에서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순수한 색과 형태만이 언뜻 유동하고 뒤섞이거나 녹아서 흐르고 있다. 그러나 각각의 색으로 구분되는 이 알 수 없는 무정형의 오브제들은 작가의 터치에 따라 각기 다른 물질 상태로 존재한다. 파동이나 거친 터치, 뭉글뭉글하거나 죽 흘러서 떨어지는 듯한 이 모든 색의 형태는 실제 캔버스 위에 켜켜이 쌓이며 층위를 이룬다. 마치 지층의 단면을 보지는 못하지만 정지궤도와 같은 높이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는 것과 같은 구도에서 최인엽 작품의 경위(經緯, 경도와 위도)를 조망할 수 있는 것이다.

3.
<기억의 지층>에서 구상(具象)은 객관적 견지(見地)를 위한 거리를 버림으로써 몸집을 키우고 비대해진다. 정물이나 풍경을 묘사하기 위한 원근법 대신 면 위에 자리한 구도, 형태, 색채, 그리고 이를 채색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경계와 층이 그림의 단면과 전면에서 실질적 공간을 차지한다. 터치에만 집중한 끝에 화면 위에 노출된 색과 물성은 거친 물질적 존재감을 피력하는데, 가장 중앙의 유성과도 같은 궤적을 지닌 검은 오브제는 유독 단단해 보인다. 그 견고한 질감은 이 추상적 구상과 무질서한 색의 파노라마 안에서 감각적으로도, 의미상으로도 균형추의 역할을 한다. 짙푸르거나 검은 반사광이 주는 광물성은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액체 상태와는 상반된다. 물감으로 만든 연못에 뒤섞이지 않는 이 검은 실체는 일종의 시그니처처럼 다른 작품 속에서 등장하면서 채색 단계 이전의 단순한 검은 선이 한데 집약된 듯한, 엉뚱하고 의미 없지만 공들이고 집요한 낙서와 같은 인상을 준다.
 <따뜻한 언어 속>이나 <제1층의 세계>에서도 나타나는 검은 오브제는 작품 전체를 일관하는 작가의 견지를 투영하는 한편, 기억 속 헤테로토피아를 생성시키는 주요한 행위와의 연결고리이다. <원더랜드>에서의 과밀하고 짙은 농도의 물성과 선연한 색감의 충돌은 뭉그러지고 흐르고 피어오르고 엉기고 죽 늘어나는 듯한 비정형의 집합으로 표현되는데 이 역시 검은 오브제가 지니는 집요함으로 구축되었기 때문이다. 최인엽의 작품은 기억 속 헤테로토피아를 묘사하기보다는 그 헤테로토피아에서의 행위와 보이지 않는 기류를 회화의 충실한 질료인 물감을 칠하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현재진행형으로 이루어지는 이러한 작업의 성격은 드로잉이라는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읽히는 한편, 회화 자체의 심미감과 그리는 행위 자체에 대한 알레고리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결국 최인엽에게 헤테로토피아에 대한 갈망과 경험은 마치 유폐된 장소 어딘가의 벽에 그린 낙서나 드로잉으로부터 시작된다. 자신 말고는 누구도 찾지 못한 속마음과 목소리는 점차 광물의 시간을 따르듯 석화되지만, 우리는 사실 헤아릴 수 있는 시간 속에서 그린 최인엽의 그림을 보면서 헤테로토피아에서의 복잡하고 산란한 기분을 낯설게 공감할 수 있다. 예컨대 <원더랜드>에서는 식용 색소와 향료를 연상케 하는 선명하고 화려한 색이 이질적이고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한편, 풍선껌이나 젤리에 대한 말랑말랑하고 끈적끈적한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4. 
최인엽의 오브제는 이러한 모종의 점성이 결집한 형태를 띈다. 물감을 캔버스에 칠하고 응고될 때의 부드러운 감촉과 접착력은 음지의 작은 생명이 노니는 습기나 미끄러운 표피를 닮았다. 현미경으로 바라본 미시적 생태계와 유사한 작품의 정경은 ‘블롭(blob)’, 즉 점균을 연상케 한다. 블롭(blob)은 황색망사점균의 별칭으로 원래 액체 방울이라는 뜻이다. 곰팡이와 아메바 같은 원생동물의 중간에 위치한 점균은 단세포로 이루어진 개체가 모여서 이동하며, 포자를 통해 번식한다. 회화의 영역에서 물감이 지니는 액체성은 사실 인공적인(artificial) 것이지만, 여기서 발생한 유동성이나 점성은 무생물도 생명이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성질이기도 하다. 생명과 비생명의 경계에 존재하는 듯이 보이는 무정형의 구상을 통해 최인엽은 현실과 닮았을 것을 모조리 해체하고 오로지 경계를 구분하는 목적으로만 선과 형태를 자유로이 활용한다. 특히 유리된 밀폐 공간의 화학 반응을 떠올리게 하는 색의 조합은 기묘한 생명의 징후나 공존으로 비치면서 촉각이 우선시되는 정경이 된다. 육안으로 보이지 않으나 느낌을 떠올리게 만드는 것은 결국 어떤 형상이 주는 은유인데, 우리가 끊임없이 호흡기를 막고 손을 닦는 촉각적 경험을 통하여 팬데믹을 기억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최인엽은 촉각의 시각화 같은 감각적 재현에서도 고유한 미감을 놓치지 않으면서 회화의 외연을 확장하는 실험적 행보를 보이고 있다. 움직임에 대한 천착이 곧 작가로서의 움직임, 즉 진전이 되고 있는 것이다.